
나는 연말휴가와 출장을 겸해 최근 도쿄를 방문했다. 사실 도쿄는 지리적으로 가장 이웃한 국가의 수도이기 때문에 매우 친숙한 곳이다. 내 기억 속의 도쿄는 긴자의 높고 화려한 스카이라인과 시부야 스크럼블 교차로를 가득 메운 엄청난 인파 그리고 그 인파 속에 간간히 섞여있는 특이한 화장과 복장의 갸루들이 선입견처럼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도쿄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본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8~9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아직도 아날로그 시스템에 의존한 채 일본사회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이라고 하듯 도쿄 한복판의 많은 식당들은 여전히 ‘현금결재’라는 안내문을 내걸고 있다. 일본정부가 카드결재를 적극 독려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동전지갑이 여전히 잘 팔리는 필수 아이템이다. 도쿄 지하철 광경 역시 우리와 사뭇 다르다. 젊은 승객들만이 간간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 뿐 대부분 승객들은 무료한 듯 허공을 주시한다. 객차가 운행 중에는 와이파이가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하철에서 문고판 서적과 만화책을 읽던 옛 모습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 뿐이다.
요즘 일본인들이 가장 절망스러워 하는 부분은 10년 전만 해도 일본인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엔화의 힘을 과시했으나 지금은 주객이 전도돼 한국인이나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 와서 온갖 서비스를 누린다는 사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해외여행은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엔화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오히려 외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일본이 먹고 산다는 자조 섞인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다.
일본이 과거에 비해 이렇게까지 침체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라이벌이나 잠재적 위협이 될 만한 국가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무릎을 꿇렸다. 냉전체재 속에 미국과 핵전쟁도 불사하며 이념대결을 벌였던 소련은 민주화 물결 속에 붕괴되었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은 거품이 걷히면서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다. 현재 G2인 중국에 대해서도 더 이상 1위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미국은 동맹국들과 공조 속에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렇듯 2인자의 운명은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일본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일본경제가 침체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GDP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G7 회원국으로서 국제적 영향력이 막강한 강대국이라는 시선과 잃어버린 30년의 후유증으로 첨단산업의 투자가 원활하지 못해 4차 산업 시대에 신속히 편승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상존한다. 특히 매뉴얼에 너무 침잠한 나머지 창의력을 저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일본을 극일 대상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일본을 뒤좇기 여념이 없었다. 최근 들어 반도체나 2차 전지, 전기차 등 일부 첨단 산업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고무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좁혀진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도쿄에서 느낀 점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이다. 일본은 우리가 얕잡아 볼 만큼 그리 녹록한 나라는 아니다.
글 /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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