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말 예술일까?”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질문이다. 캔버스 위의 점과 선, 일상용품을 전시한 작품,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메시지. 왜 현대미술은 이토록 난해하게 느껴질까?
고전 미술은 자연 풍경이나 인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감상자들은 그림 속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르다. 사진기의 발명 이후, ‘있는 그대로의 재현’은 더이상 미술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미술은 점차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 즉 감정, 생각, 개념의 세계로 이동했다. 추상화가 등장했고, 익숙한 형상은 해체되었다. 이제 작품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본질이나 작가의 내면을 점·선·면, 색채로 표현한다.
중세시대 미술이 신화나 성서 등 보편적 이야기를 담았다면, 현대미술은 상징과 이야기를 해체한다. 관람자는 더이상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작품은 각자의 경험과 해석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예술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이 동등하게 중요해진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소변기)처럼, 예술가의 개념만으로도 작품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미술의 정의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현대미술은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 심지어 과학, 음악, 문학 등 타 예술과 융합되기도 한다. 이런 다양성은 예술의 폭을 넓히지만, 동시에 관람자에게는 낯설고 복잡한 경험을 안긴다.
현대미술은 대중미술과의 차별화를 위해 점점 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미술계의 급변하는 트렌드, ‘스타 작가’ 중심의 전시, 언론매체의 편향된 정보 전달 등도 현대미술을 더욱 난해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대중은 검증된 고전 작품에는 익숙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다채로운 실험에는 거리감을 느낀다.
현대미술이 난해한 것은 단순히 작품의 특성 때문만이 아니다. 익숙한 재현과 이야기를 벗어나, 다원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해석의 자유, 그리고 정보의 편향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 현대미술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해석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은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현대미술을 즐길 수 있다.” 난해하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라는 무책임하게 들리는 이 말이 정말 옳다고할 수 있을까?
익숙함의 해체, 자유로운 해석, 그리고 낯선 실험.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이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유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분히 엘리트주의를 담고 있다. 마치 특정인만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그것이다. 도슨트나 큐레이터의 도움없이는 좀처럼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감상도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얘기다. 특히 작가주의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의 경우 사전 지식없이는 감상자가 작가의도를 정확히 읽어내기 쉽지 않다.
일반 감상자가 “이것도 작품이야”라고 난해해 할 때 전문가 집단은 너희와 다르게 우린 작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엘리트주의가 현대미술에는 만연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작품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중섭 작가가 담배곽 은지화에 낙서하듯 그린 그림이 의미있게 해석되는 것은 바로 작가가 이중섭이기 때문이다.
글/ 민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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